토마토소스 일으켜 세우기

2015. 2. 14. 15:48일기

<토마토소스 일으켜 세우기>

2015.02.12 목요일


배가 고프다. 밥이 먹고 싶다. 오후 5시 10분, 저녁을 먹기는 좀 이른 시간이고, 아직 엄마도 돌아오지 않아서 먼저 저녁을 먹기는 좀 그렇다.


그리고 단순히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무언가 맛난 음식이 먹고 싶다. 겨울방학 동안 일과의 중심, 허리뼈를 펼 수 있게 하는 맛있는 급식을 못 먹어서 내내 그리워했던 걸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무심코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딱딱한 멸치, 돼지고기 장조림, 김치, 묵은 김치 외에 무언가 만들어 먹을만한 건 별로 없었는데, 구석진 곳에 엄마가 며칠 전에 만들어 먹고 남은 삶은 스파게티 면이, 플라스틱 곽 안에 들어 있는 걸 발견하였다. 스파게티 면을 꺼내면서 뭘 만들지는 여전히 고민이었다.


얼마 전에도 나 혼자 집에 있을 때, 먹다 남은 스파게티 면으로 요리를 해먹은 적이 있었는데, '알리오 올리오'라는 이름이 맘에 들어서 레시피를 보지 않고, 그저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스파게티 면을 볶았다. 그러나 오, 알리오 올리오~! 거창한 이름값은커녕, 면끼리 쫀쫀하게 엉겨붙어서 먹지도 못하고 버린 다음, 엄마에게는 만들어 먹었다고 딱 잡아뗀 기억이 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제대로 레시피를 보고 만들어야겠다! 냉장고에서 꺼낸 면을 식탁 위에 두고 노트북을 켰다.


토마토소스, 다진 고기, 다진 마늘, 챙겨야 할 것들을 냉장고에서 찾아보았다. 레시피에 적힌 재료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었고, 대신 비슷한 재료들을 찾았다. 다진 마늘 대신 타파에 들어 있는 깐마늘을 집어들고, 다진 고기 대신 장조림을 꺼냈다. 도마를 놓고 깐마늘은 나름대로 엉성하게 칼로 다졌지만, 장조림은 건드리기가 어려워서 그냥 통째로 넣을 것이다. 얼마 전에 엄마가 장 봐 오셨을 때 언뜻 보았던 토마토소스도 찾아 꺼냈다. 재료는 그럭저럭 준비됐고 프라이팬을 준비해야 한다.


지난번에 요리하다가 프라이팬을 새까맣게 태운 적이 있어서, 프라이팬 선정에서부터 신중해야겠다. 싱크대 아래쪽 찬장을 열고 큰 것, 아주 작은 것, 새것은 피하고, 평소에 잘 안 쓰는 허름하고 아담한 크기의 프라이팬을 꺼냈다.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를 때는 항상 긴장된다. 엄마나 할머니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적당히 찔끔~하고 식용유를 두르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아무리 아기 다루듯이 식용유를 뿌려도, 식용유는 항상 프라이팬을 우물처럼 만들어서, 그대로 요리를 하면 어떤 요리든 타고 튀겨지는 것이다.


실패했던 수많은 나날을 떠올리며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정도로 힘을 줘 식용유를 짰지만, 역시 이번에도 찔끔~이 아니라, 풍덩~하고 프라이팬에 떨어져 가운데에 작은 호수를 만들었다. 면과 프라이팬을 튀길 수는 없어서 배수대에 식용유를 조금 흘려보냈다. 그리고 먼저 다진 마늘을 넣었다. 말이 다진 마늘이지, 그저 깐 마늘을 뭉특뭉특 썰어서 크기도 들쭉날쭉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들어간 지 얼마나 됐다고 까맣게 그을리기 시작했다. 화닥닥 불을 작게 줄였다. 항상 뭔가 타고나서야, 작은 걸 요리할 때는 큰불을 쓰면 안 된다고 했던 말이 기억나는 걸까?


심각하게 탄 마늘 조각 몇 개만 건져내고, 돼지고기 장조림을 집어넣고 스파게티 면을 쏟아넣고 나무주걱으로 촤아촤아~ 뒤적뒤적 볶았다. 요리할 때를 통틀어 이 순간이 제일 좋다. 별거 아닌 동작이지만, 볼 사람도 없지만, 왠지 있어 보인다. 이 동작을 하고 있을 땐 프로 요리사가 된 기분이다. 요리사가 된 기분을 조금 만끽하고 토마토소스를 부어 넣을 차례다. 새것이라 그런지 뚜껑이 잘 안 열리는데, 간신히 퍽~하고 뚜껑을 열자 이때다 하고 내용물이 신 나게 흘러나온다. 프라이팬과 가스레인지, 부엌 바닥까지 튄 토마토소스는 토사물처럼 어지럽고 끔찍하게 보인다.


잠깐 불을 끄고 바닥과 가스레인지 위까지 행주로 닦았는데, 손가락이 뜨겁고 아려왔다. 화상을 입은 게 아닐까 걱정이 돼서 빨리 수돗물을 틀어 흐르는 찬물에 손가락을 대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이게 웬 난리야 하며 영우가 주방으로 온다. 아직 따끔거리는 손가락으로 귓불을 만지작거리면서, 토마토소스를 붓고 다시 불을 켠다. 영우가 자꾸 뭐라고 묻지만, 뜨거운 것에 데인 충격과 요리에 대한 집중으로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뭐가 문제일까? 불도 세지 않은데 물컹흐믈하던 토마토소스가 프라이팬 바닥에 붙어서 부글부글 누룽지처럼 변해간다. 가문 땅이 쩍쩍 갈라지듯이 프라이팬 바닥에 눌어붙으려고 한다.


주걱으로 계속 뒤적거려서 토마토소스를 다시 일으켜준다. 잠깐 일으켜줬을 때는 다시 물광을 내며 생기를 띠지만, 정말 몇 초도 못 가 츠즈즈즈~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가라앉아 프라이팬 바닥으로 꺼져간다. 이쪽을 일으켜주면 저쪽이 가라앉고, 저쪽을 일으켜주면 이쪽이 가라앉아, 나는 주걱으로 뒤적거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토마토소스가 모자라서 그러는 게 아닐까?' 엄마 안 계실 때 몰래 하려는 욕심 때문에, 새로 산 토마토소스를 너무 적게 넣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서 토마토소스를 조금만 더 넣어보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만 주저앉아 바닥이 되는 토마토소스를 주걱으로 일으켜줘야 해서 움직일 수가 없다. 다급하게 영우에게 부탁했다. "영우야, 저기 토마토소스 좀 여기다 더 넣어줘!", "어떻게? 부어?", "저기 숟가락으로 떠서~!" 내가 주걱으로 땀 흘리며 프라이팬을 휘젓는 동안, 영우는 프라이팬 안에 숟가락으로 토마토소스를 떠서 넣었다. 마침 조수도 생겼겠다, 냉장고에 있는 네모난 비닐에 쌓인 치즈도 까서 넣어본다. 레시피에는 모짜렐라 치즈를 넣으라고 써있었는데, 그게 뭔지도 모르니까 넣을 수는 없고, '라면에 넣어도 잘 어울리니까~' 하는 생각으로 사각 치즈를 넣었다.


마침내 불을 끄고 완성이 다 된 요리를, 식탁 위에 프라이팬 채로 라면 냄비 받침을 놓고 탁~ 올려놓았다. 영우와 각각 젓가락을 집어들고 스파게티의 비쥬얼을 감상해보니, 레시피에서 봤던,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나올 것 같던 스파게티 대신, 술집의 볶음국수 안주 같은 피곤해 보이는 스파게티가 씩씩 김을 내고 있다. 모양보다도 걱정인 것은 맛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재료가 내 손을 거쳐 쓰레기통으로 갔던가! 먹을 수 있기만을 바라며 젓가락을 들었는데, 이게 웬 걸? 내가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획기적인 성공이다. 영우도 "생각보다 괜찮은데?" 하며 후루룩 찹찹~ 코를 묻고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