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점잖은 지옥 <힐>

2015. 7. 20. 11:42독서

<가장 점잖은 지옥 힐 >

2015.07.20 월요일


지난달 말, 라페스타로 이사 한 출판사 <북인더갭>에 엄마와 방문한 적이 있었다. 지난번 사무실도 백석역 앞이라 자주 들러봐야지 하면서도 그렇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고, 오랜만에 안병률 대표님과 김남순 실장님이 뵙고 싶었다.


마침 <상우일기> 2쇄가 나왔으며, 김남순 실장님께서 처음 출간하신 장편소설 <힐>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북인더갭이 있는 오피스텔 건물 6층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똭~ 내리니, 나는 순간 멈칫했던 기억이 난다.


겉보기에 틈이 없이 꽉 막힌 시멘트 기둥 같았던 오피스텔은, 복도 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려 있어 천장부터 옥상, 아래로는 1층 복도까지 전부 볼 수 있었다. 한눈에 담기에는 너무 커서 웅장함과 위압감이 느껴졌는데, 단순히 뚫린 구멍으로 위아래층을 볼 수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벽과 문, 기둥, 복도, 모두 흰색과 회색으로 칠해진 창백한 조화는 분명히 몇호, 몇호로 씌여진 저 문안에, 저 벽 너머에, 색깔을 가진 공간과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 같았다.


처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순간, 어디서 왔는지 모를 밝은, 그러나 전기의 빛과는 다른 부드러운 빛이 온 건물을 채우고 있었다. 창백한 건물의 유리로 된 천장이 건물 내부를 햇빛으로 채워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멀리 맞은 편 617호 사무실에서 안병률 대표님이 '여기 사람이 있어요!' 하듯이 문을 열고 나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책을 읽을 때는, 그 책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나름대로 상상해보고는 하는데, <힐>을 읽고 얼마 안 돼, 나는 바로 <북인더갭>이 있는 그 유리 천장의 창백한 오피스텔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었다.


김남순 실장님은 안 보이셨는데 책을 낸 여파로 집에서 몸살을 앓고 계신듯 했다. 대신 아직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것 같은 따뜻한 사인이 새겨진 장편소설 <힐>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평소에 김남순 실장님의 쾌활한 모습과 말투를 떠올려보며 <힐>은 어떤 소설일까? 궁금해했다. 그런데 안병률 대표님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제가 민음사에서 근무할 때 이 사람을 만났는데요, 출판사로 글을 투고했는데 글이 참 좋더라고요, 글이 무지 진지해서 꼭 만나보고 싶어했어요. 근데 만나니까 사람이 영 딴판인 거예요. 장난 잘 치고 웃기고 가벼운 이야기도 많이 하고~ 책은 안 내고 저랑 연애하고 결혼 생활하고 인제야 책을 낸 거죠."


그래, 평소 실장님의 모습과 전혀 다른 소설이구나, 나는 기대하며 작정하고 읽게 되었다. 김남순 실장님은 김조을해라는 필명을 쓰셨고, 할아버지의 고향이 황해도라고 하신다. 6.25 전쟁통에 남으로 피난 와 실향민이 된 실장님의 집안 내력이 <힐>을 쓰게 된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단순히 실장님의 집안 내력만이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절대 아니다. 마치 영화관에서 울림이 있는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온 듯한 느낌, 영화에 비하자면 팡팡 터지는 액션영화는 아니지만, 조용하면서도 살얼음장을 걷는 듯한 긴박감 넘치는 스릴러 영화에 비교하고 싶다. 게다가 요즘 우리 사회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어서 기분이 묘했다.


국정원 해킹과 직원의 자살 사건으로 떠들썩하고 정부에서 하는 일이 무엇이 진실인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지금, 여기 또 하나의 소설 속의 가상 공간, <힐> 제국 수용소가 있다.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땅에 전쟁을 일으켜 세운 <힐> 제국은 '국민의 높은 삶의 질'을 주장하며 급속도로 성장한다. <힐> 제국 수용소는 공원, 분수대, 체력단련실, 스파, 사우나, 도서실, 카페, 강연장, 음악회가 열리는 대강당 등, 깨끗한 주거시설과 문화시설을 갖춘 리조트 같은 공간이다. <힐>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아무 불편 없이 쾌적한 삶을 누릴 것 같지만, 그 삶의 대가는 제국에의 복종, 그것도 정신의 뿌리 깊숙한 곳부터 재교육을 받아서 나오게 되는 철저한 복종이다.


주인공 청년 작가 마기는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의 작품을, 어머니의 고향인 소수부족의 언어로 번역하여 출간하려 한다. 어머니 고향의 영혼이 담긴 방언으로 번역하여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 부족의 사람들과 가족에게 행복을 주고 싶은 것이 꿈이다. 그러나 <힐> 제국은 방언본을 허락하지 않는다. 오로지 <힐> 제국의 언어로만 번역판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제국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마기는 <힐> 제국 수용소로 호출되어 호텔식 수용소에 감금되고, 이때부터 제국의 충견인 간사들을 상대로 어머니 부족의 말과 글, 영혼과 정신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다. 과연 마기는 <힐> 제국을 탈출하여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머니의 고향인 남으로 내려갈 수 있을까?


김조을해 작가님의 주인공 마기는, 도저히 여성 작가님의 손에서 태어난 인물이라고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남성의 심리를 잘 표현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경험하지 않은 것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김조을해 작가님은 어떤 경험을 하셨길래, 이렇게 소심하면서도 저항의식이 강한 청년의 심리상태를 잘 이해하고 풀어내시는지 알 방법이 없다. 연륜이라는 게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남자 주인공만 그런 것은 물론 아니다. 마기의 동생 욘데, 북쪽 여자 세백, 큐선생과 그의 부인, 에보스 간사, 하륜 간사 등, <힐>을 펼치면 만나 볼 인물들의 말과 행동은, 마치 이 책이 시작되기 전에도, 시작된 후에도 계속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 넘친다.


그들의 심리묘사는 그들이 자신의 뇌를 토해 놓은 정수처럼 완벽해 보인다. 이것은 기교를 부리진 않았지만, 가장 정확한 단어와 묘사 덕분에 단어 하나도, 문장 하나도 허투루 읽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힐>은 분명한 판타지 공간이지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낯선 공간이 아니다. 김조을해 작가님의 세밀화를 보는 것 같은 세세한 묘사와 더불어, 그 소재 자체가 현실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계속 들기 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책이다. 소박한 '부족'의 글을 말살시키려는 '제국'의 모습은, 과거 문화적으로 우리나라를 짓밟으려 했던 섬나라와, 사실이 뭐든 국민에게는 감추려고 보는 국정원의 요즘 행태와도 일치한다. 올여름은 헬이 아니고 <힐>이다!